한 달 전 쯤에, '약국 이야기'와 '병원 이야기'를 들려드렸지요.
오늘은 그 후속 - 指押 이야기 입니다.
다들 짐작은 하시겠지만, 지압(指押)이란, 몸의 잘못된 부위를 일정한 손의 압력으로 눌러 고치는 ,.....일종의 전수된 한의학적 치료법이지요.
저의 아내는 8월 28일 허리 디스크 수술을 앞두고 내일 8월19일 여러가지 검진을 하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저의 아내는 이미 다섯 차례나 전신 마취의 경험이 있답니다.
그래서 일단 수술은 포기 하려고 마음 먹었지요. 이번에 전신마취를 또 하게되면 6번째가 되는 데 마취에서 깨어나는 속도도 느릴뿐아니라. 항간에는 , 현재 디스크 수술 법이 많이 좋아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100% 치료는 어렵다는 소문도 있고. 무엇보다 환자가 겁을 내고 있지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 처제들의 주선으로 指押으로 고쳐보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는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술 전 제반 검사를 완전 취소 했지요. 일단 마음 편하게,.....
여기에서, 저의 아내의 5번에 걸친 전신마취의 내력을 짚어 보고 싶네요..
*결혼 1년 후인 1975년, 첫 아이를 가졌을 때는 희귀한 임신 중독증(의학명으로;"에크렘샤"라고 하더군요.)으로 완전 식물인간 상태에서
소생한 내력이 있습니다. 당시 임신 8개월이 되었을 때인데, 이미 주사로 뱃속의 아이를 죽이고도 7일을 빈사상태에 있다 살아 났지요.
당시 혈압이 260 을 오르 내리는 바람에 부산대학병원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두번이나 척추에 기다란 바늘을 꽂고는 뇌혈관이 터졌을 거라며
뇌수를 채취하였었지요.....그런데 아무런 이상이 없는거예요. 희한하게....
그때 저의 아내는 부산대학 병원의 거의 전 의사들한테 "인간 몰모트"가 되었었지요.
산부인과 입원이었지만 안과,치과,내과,외과,임상병리학과등 전과목의 의사들이 매일매일 병상기록들을 체크하곤 했었답니다.
내과 의사의 처방에 따라 이약,저약을 써본지 7일째에 아주,...정말 아주 미세한 의식이 있다는 진단에 의해, 수술실도 아닌 산부인과 응급실에서
희한한 수술방법으로 이미 죽어있는 뱃속의 아이를 긁어내었지요, "질"속으로 해서 ...그러고 나서 약 3시간 후에 조그마한 목소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의식을 찾게 되었었지요.
저는 이미 부숴져 버린, 빛도 못보고 없어진 태아를 - (빛도 못본 死産兒라도 6개월이 지난 것은 병원에서 처리를 해 주지 않기에) -
저는 마음속으로 굵은 눈물을 흘리며 병원 청소부에게 부탁했었지요. "양지 바른 곳에 잘 묻어달라"고, 금 일봉과 함께,.....
그 때 약하게 찾은 의식 속에서 저의 아내는 여성 본능의 첫번째 아이에 대한 모성애를 발휘하더군요..
주위의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저만 알아듣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더군요, 옆에 장모님,처형, 그리고 제 남동생이 있었는데,
아내가 말하는 것을 저 외에는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진짜 부부인가 해요.
"아이를 보여달라"고.. 이미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아이를 자기는 제대로 출산한 줄 아는 것이었고, 또 8일만에 찾은 의식을
그냥, 한 두어시간 정도 출산하느라 깜밖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지요.
저는 응급실 밖 의자에 앉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안타까운 눈물을 흘려야 했었습니다. 너무 힘든 시간들이었으니까요.
부모 형제들은 모두 서울에 있고, 산업역군이랍시고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동분서주할 때였으니까요.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던 아내를 꽉 막힌새장에 가두어 놓은 것 같이 울산에다 데려다 놓고 나름대로 알콩달콩 한 생활을 하다
갑자기 닥친 처음 맞는 일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서러웠던 것이지요.
입원한지 8일만에 의식은 돌아왔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오랜 동안 입원생활과 갓난 어린아이와 같은 음식을 먹으며
삶에 필요한 체력을 회복하였었지요.
저는 제 아내가 부산 대학 병원에 가기전 부터 회복되어 퇴원 할 때까지 "팬티"를 한 달간 갈아입지 못했었지요. .......거지가 따로 있나요, 뭐,,,그런거였지요.
무지하게 "기도" 했었지요. 병원 응급실 밖 복도에서,.....
의사들이 보기 딱 했던지."보호자가 여기 있어도 별 수 없으니 나가 있다 오라"나요.
그 때 저는 저도 모르게 의사한테 "선생님이 고치시나요?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거지요!"
라고 무의식적인 반사의 항변을하였었지요.
의사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더군요. "이 사람이 잠을 못자더니 이상해 졌구나!?"하는 표정으로,...
참으로,,,그래요. 그 고백이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섭리였던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되뇌이곤 한답니다.
*그후 건강을 되 찾아 잘 지내고 있을 때 다시 아이를 가졌었지요.1976년 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안되려니까. 임신 3개월 상태에서 "요로결석증"에 걸린것이 발견 되었지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지우고는,
-그 때 당시는 "요로결석 수술"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최신 시설인 울산 현대 병원에서도 요로결석 수술이 안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의 "원호병원"에서 의사를 지정하여 수술을 받을 수가 있었지요.
어른 엄지 손가락 만 하면서 꽤나 날카로운 결석을 끄집어 내었지요.
그것이 두번째 전신 마취 수술이었습니다. 그 때 두번째 임신 하였을 때는 생전 먹지 않던 암소갈비를 혼자 5대 까지 먹으면서
참 건강도 좋았었는데,,,,,,,,,,,,,,,,,,,,,,,,,
*세번째는. 지금의 예쁜 딸 아이를 출산 할 때였지요.1977년의 일 입니다.
한 겨울 12월에 수박이 먹고 싶다는군요.
지금이야 아무때나 먹을 것이 풍부하지만, 당시 1976년 겨울에 울산에서 어떻게 수박 따위를 구 할 수 있답니까?
참,,,디게 속 썩이는 마누라였지요. 그래도 어떡해요.
처제한테 자기 언니를 부탁해 놓고 연말연시 부모님께 인사하러 혼자 서울에 왔지요.
1월2일 남동생 두명과 함께 "혹시나 모르지...."하면서 남대문 시장을 훓었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실제로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시장 한귀퉁이에 과일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와!"하는 감탄과 희열을 갖고, 어린아이 머리만한 수박 두 통과, 참외 두 개와 포도 한 송이를 샀지요. 지금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어린아이 머리만한 수박이 7,000-원 했나 생각되요.
당시엔 무지한 거금이었다는거 아닙니까. 작은 포도 한 송이가 2,500원 조그마한 참외는 아마. 한 개에 3,000-원인가 그랬을 거예요.
하여튼 거금 이었다니까요.당시엔,......
종이에 잘 싸서 고속뻐스 화물칸에 넣어 왔지요. 행여 차안에 두었다 더워서 변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집에 갖고오니,
우리 말에 - "게눈 감추 듯 한다"는 말을 실제로 알게 해주는 행동으로 허겁지겁...수박이 통째로 없어지는 거 였지요,..참.....그후 한참 시간이 지난후,
원체 약한데다 심한 입덧 탓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여 심한 임신 고통에 시달리다, 제왕절개로 지금의 딸 아이를 얻었지요.
그 때- 제왕절개중에, 혈압이 300 이 되었답니다. 혈압기의 눈금이 300 까지인데. 그것을 꽉 채운 것이지요. 수술한 의사나 간호사,
그리고 그 후에 유능한 의사한테 이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 모두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는 혈압이 150만 되어도 "어이쿠.."하고 걱정하는데. 저의 아내는 260을 두번이나 올라갔지요.
또 혈압기의 끝 눈금인 300 까지를 꽉 채우고도 살아 났으니까요.
대구 파티마 병원으로 간 유능한 어느 의사 말씀인즉, "현대 의학이 많이 발달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인간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말로 답을 하더군요.
사실이지요. 저는 첫번째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저의 아내에게는 인간의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훨씬 뛰어 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최신 현대 의학의 지식으로도 저의 아내는 몇 번 죽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고, 또 매일매일 가족들의 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무엇이라 단언 할 수 있겠습니까?1
여하튼 그래요. ...그렇게 해서 세번째 전신마취를 통하여 지금의 딸 아이를 얻었고, 열심히 살아가는 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지요.
*네번째 이야기를 해야 할 순서군요.
1978년 이었어요. 그 때 저는 울산을 떠나 인천에 있는 현재의 현대 삼호 중공업-(한라중공업)-전신인 현대양행 인천조선소 영업부장으로 있을 때 였습니다.
인천 주안에 있는 13평 짜리 주공 아파트에서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려다, 건축주한테 사기를 당하게 되었지요. 현재의 집은 비워주어야 하는데. 이사갈 집은 약속을 어기고 준공은 커녕, 아직 공사가 마무리 되려면 6개월은 더 걸려야 되는 지경이 되었지요. 세상 물정도 잘 모르던 터에,.....그냥 건축주를 회유하여 한 200세대 들어가는 연립주택중, 유일하게 제가 살 집만 마무리 하여 허허벌판같은 연립주택 단지에 혼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전기는 옆 동네에서 끌어다 임시로 가설하고, 수도 또한 옆 동네에서 호스로 끌어다 쓰는 완전한 임시 가설 주택이었지요.
그때 저의 아내는 네 번째 임신 중이었지요.
첫 번째 아이 사산 할때, 썼던 수술 방법이 희한하여, 저의 아내는 자궁 경관의 기능이 없는 상태 였습니다. 힘든 현실에서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보니 임신 8개월의 아이를 감싸고 있는 뱃속의 양수가 터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부랴부랴 대충 옷가지와 갓 돌 지난 딸아이를 등에 업고는 택시를 대절하여 부모님께로 갔지요. 아버지,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곤, 딸 아이를 아버님께 업혀드렸지요.
그리곤 신촌 세브란스로 갔습니다.
당시 세브란스 암 쎈타 소장이 저의 사촌 매부였습니다. 지,지난해까지 연세대 총장을 지낸 김병수박사지요.현재는 포천중문대 총장이고, "자랑스런 한국인 심사위원장"이라나요?
아버님께. 매부한테 전화 좀 해 주십사고 부탁하고 떠났기에. 퇴근 시간이 막 지난 시점에 세브란스에 도착했지만 당시 산부인과 과장인 황박사와 매형인 김병수 박사가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남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고 응급실이나 갈 상황인데, 끝발 좋은(?) 매부덕에 바로 입원하여 제반 절차를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던거예요.
첫 번째 아이를 끄집어 낼 때 사용한 희한한 수술 방법 때문에 이미 저의 아내의 자궁 경관은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인데. 여기 세브란스 황박사는 그 내용은 잘 모른채 자기가 공부한 영국식의 출산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었고,
지난 날의 저의 아내의 병력을 이야기 할라치면, 매부는"자네가무얼아나. 그냥 의사한테 맡겨야지.."하는 바람에 죄 지은 사람 모양 입도 제대로 못 놀리곤 그냥 처분 만 기다렸지요.
퇴원후 이야기이지만, 그때 병원에 도착한 즉시 제왕절개 수술을 했으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있기도 해요.
한번 제왕절개 수술을 하였어도 그 다음에도 유도분만이 가능하다는 영국식의 출산 방법을 시도하는 황박사님 덕에 이틀이 지난후 유도분만을 포기하고, 제왕절개를 하였지요.
이미 태아는 양수가 없으므로 인하여 알지 못하는 병원체에 감염 되었던 것이지요.
그때 집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더 이상 네 아내 고생 시키지말고 이제 그만 네 아내 나팔관을 묶고, 단산하려므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가 저의 아버님의 회갑연을 한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고, 저 또한 이번에 낳는 아이는 틀림없는 아들이니까. 저는 "맏 자식으로서 아버님 회갑연은 물론 친손자까지 안겨드리게 되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수술전, "이번 수술 중에 환자의 나팔관을 묶어 주십시오"라는 특별 주문을 하였습니다.
정말 모든게 다 이루어지는 것 같은 착각과 교만한 마음이 생겼었지요.
입원 3일째 되는 날 네번째 전신마취가 이뤄졌습니다.
8개월이 좀 지난 태아를 꺼내는 수술이었지요.
당시는 술과 담배를 생각없이 즐기던 터라. 수술실에 환자를 들여보내곤 복도에서 서성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 다 하나님이 잘 해주실꺼야"라는 그저.... 오만한 마음을 갖고서,..
수술실에 들어간지 약 30 여분 된것으로 기억되는데. 병원 spearker에서 저를 찾는거예요.
특별 case지요. "환자 보호자는 급히 수술실로 오라"고요....
그래 급히 달려갔더니 수술실 문앞에서 의사 한 분이 수술 까운을 들고 저를 기다리더군요.
수술복을 입고 머리에 수술두건을 쓰고, 발에도 수술실 전용 신을 신고,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의사들이 저의 아내의 갈라놓은 배와 막 꺼내놓은 아이를 둘러서 있고 주치의 황박사께서 저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아이의 상태가 무척 나쁜데, 그래도 단산조치를 하렵니까?"
저는 정신이 다 나아간 상태 였습니다.
옆에 꺼내놓은 아이,- 그 조그마한 핏덩어리는 이미 머리에 무슨 약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주사바늘을 두개나 꽂고, 산소 호흡기를 댄 상태 였습니다.
저의 아내는 죽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수술을 당하고 있고요.
저는 그 순간에도 회개하는 마음도, 또 감사하는 마음도 아닌 참 교만한 상태였지요.
내가 행한 잘못된 것 들은 생각지 않고, "그저 걱정없어. 하나님이 다 해주실꺼야."라는 온전치 못한 건방을 떨고 있었지요.
....."예, 그냥 묶으세요. 괜찮아요."라고 하면서,....
수술실 밖을 나와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도 막연히 "걱정없어 다 잘 될꺼야"라는 자만으로 가득했던거지요.
몇시간이 지나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온 아내를 위로하곤 처제한테 병실을 부탁했지요. 그리곤 의기양양한 마음을 갖고 부모님 집으로 갔지요.
집에들어서니 아버지께서 갓 돌 지난 맏손녀"은"이를 등에 업으시고, 저에게 물으시더군요.
저는 "아버지 저 할꺼 다 했어요. 아들이예요. 아버지께 손자 낳아 드렸어요."라고 자만 스런 표정을 짓곤 언덕 넘어 오기전 시장에서 사온 돼지고기 한근과 작은 위스키 한병을 갖고, 어머니께 돼지고기를 구어 달라고 하곤 작은 방에 들어갔지요.
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천신만고끝에 이젠 아들도 얻었겠다. 아내도 회복되는 것을 보았겠다. "아,..한잔하고 푹 잠 좀 자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감사하다"는 생각.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생각은 도무지 나질 않았습니다. 자만으로 가득차 있는데 그런 생각이 어디 붙어 있을 곳이 있었겠어요?
방에 들어가서 어머니께서 차려주실 저녁을 기다리다, 사 갖고 온 작은 위스키도 열어보지 못한채 그냥 곯아 떨어졌습니다. 무척 피곤하였었고,
또 긴장이 확 풀린 상태였으니까요.
한참 자고 깨니, 훤한 다음 날 아침 이더군요.무척 오래 잤지요.
얼른 아침 밥을 먹곤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문밖을 나오는데, 아버지께서 말씀을 하시더군요.
"야,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당 한단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하지 말아라" 이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무런 생각도 않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 할 꺼 다 하지 않았어요. 잘 다녀 올께요." 라고 자만스런 인사를 하곤 병원으로 갔지요.
병원에 도착하자 마자 소아과 인큐베이터실로 갔습니다.
"똑똑" 문을 두드리어 의사를 부른 후 "저, 우리 아기 잘 있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의사는 의아스런 눈으로"모르세요? 어제 저녁 갔지않아요?"라는 겁니다.
망치가 아닌 "오 함마"라는 것으로 아주 세게 맞은 거 같은 거 있지요. 그런거,........
(그때 그 소아과 의사가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동기 박정식이었답니다.)
지난 밤에 매부의 연락으로 이미 아버지는 손자가 태어나자 마자 9시간 만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멍~하니 잠깐 의사를 쳐다보곤, 아내가 있는 병실을 지나 복도 끝 나무 의자에 앉았지요.
담배 한대를 꺼내 불을 붙이는데.. 그 순간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그리고, 시간을 질질끌면서 보호자의 이야기를 묵살 낸 의사와 매부,
회개와 감사를 잊은 채 "나 다 했어"하는 자만과 오만과 교만의 마음. 등 등....
주마등 같이 생각의 파노라마가 휙휙 지나가면서 힘들었던 것을 뒤집어 쓴 허탈한 상념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이었지요.
천천히 담배를 피우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내의 병실로 들어섰습니다.
아내의 머리맡에 있던 처제가 눈을 깜밖거리며, 죽은 아이의 실체를 모르는 아내의 현상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개복수술 후에 회복단계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까스"분출이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아내의 보고를 들으면서,
"이 현실을 어떻게 수습하나" 하는 생각에 젖어들게 되었습니다.
고생한 처제를 집에가서 쉬게 하고, 이제 혼자 병실을 지키게 되었지요.
다음 날 이었어요. 어렸을 때 친구가 병 문안을 왔지요.
이 친구 눈치도 없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어이, 그놈 갔다며.."하는 거예요.
이거 큰일 났지요. 저의 아내가 알게 되면 잘못 하다간 "정신착란증"까지 유발한다는 모성애가 발동하면 큰 난리인데,.....
순간, 저의 기지가 發하였습니다.
"응, 내가 병원에 있다보니, 그 친구 가는 걸 못 봤지, 아마 어제 비행기 였을꺼야..L.A.로 간거겠지.."
아내의 머리 끝에 서서 친구를 향하여 눈을 최대한 껌벅이며 둘러댔지요.
엄청난 위기를 넘겼지요. 그리곤 아내에게 "잠깐 담배 한대 피우고 올께"라고 하며 그 친구를 끌고 복도로 갔지요. "휴~~~"
그런 다음 날 이었습니다.
여자의 직감, 모성애의 예감,......아이에 대하여 아무말도 안하고 있는 남편..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아이가 잘 못 된 거 같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아내는 조용히 묻는 것이었습니다.
"애기는 어때요?"
"응 괜 찮아. 유리 병속에 잘 있어."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
"저 괜찮아요. 어떻게 되었지요?"
"........................................."
한참 후 저는 아내의 손을 살포시 잡곤 이야기를 시작 했습니다.
"여보, 지금 우리 "은"이만 잘 키우자. 지금 낳은 아이가 아들이긴 한데,
좀 그래,, 괴물 같아, 손가락도 여섯 개고, 입도 코도 온전치 못해.
나, 당신하고 은이만 있으면 되는 데....... 이상하게 생긴 아이를 키우고 싶진 않거든."
이미 죽은 것을 모른는 아내에게 최대한 흉물스런 아이라고 거짓으로 회유하였지요.
드디어 아내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또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면서, 계속 이야기 하였습니다.
좋은 말로, 위로의 말로, 희망섞인 말들로,,,,,,,,,
"정말 그렇게 흉하게 생겼어요?"
"응, 아주, 가서 보기도 싫어, 여보...."
약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냉정을 찾은 아내는,
"그럼 , 우리, 이제 어떡해야 하나요?"
"응, 병원에선 기증하라는데,,,,그 아이를,,,,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
"정말 그렇다면 그렇게 해요. 그런데 저 또 아이를 낳을 수는 있나요?"
"아니, 이제 그만, 아버지도 그만 낳으라시는데,... 당신 너무 고생하지않아. 우리에겐 "은"이가 있으니까. "은"이만 잘 키우자, 응.."
"그럼 저 나팔관 묶었나요?"
"그럼,"
"그럼,아빠도 정관 수술 해야 하는 거 아니예요."
"걱정마, 나는 당신 뿐이잖아...."
그 와중에도 여자의 본성은 그런건가봐요. 자기 아닌 다른데서 혹시 아이를 ........하는 마음.. 참, 내........ 그런거지요, 뭐....
그래서 네 번째 전신마취의 행사(?)를 치뤘지요.
휴~~~~~ 힘들었어요. 사실, 그때는
*잠깐, 지난 첫 번째 아이 잃었을 때도 아내를 회유하느라 혼났었거든요.
그 이야기도 잠깐 할께요.
그때 아내가 의식을 찾고, 비로소 응급실을 벗어나 당당하게(?) 병실을 배정 받을 수 있게되었을 때, 정말 기쁨이 엄청나게 넘쳤었지요.
그래서," 이 병원(부산 대학병원도 국립병원이랍니다)에서 제일 좋은 병실을 주시십오"라는 의기양양한 주문을 하여, 유사시, 대통령이 머물 병실,
그 다음, 이 대학 총장이 머물 병실 다음으로 좋다는 특실을 배정 받았었지요, 근데,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마음의 기쁨이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그저 최고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때는 현대 중공업 구매부 대리 시절이었습니다.
구매부에서는 특별 배려로 "마음 껒 병 간호 하라"하여, 근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염려는 접어 둘 수 있었지요,
그 당시 상사가 오래전 저 세상으로 가버린 정주영 회장의 넷째 아들 "정몽우" 차장이였지요.
맡은 업무가 덩치 큰 업무들이다 보니, 관련 업체들도 꽤 많았습니다.
병실에 있으면서, 병 후 회복에 좋다는 음식은 몽땅 업체 사장님과 사모님들이 가져다 주었지요.
마시는 보리차도 업체 사장님들이 직접 끓여다 주는 친절함과 융숭함이 저의 주위에 쫙 갈려 있었지요. 얼마나 고마운 일들 이었기예요.
그건 그렇고요. 특병실에 있은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한 4~5년 위 정도 되는 업체 사장과 부장이 병 문안 겸 왔어요.
그리곤, 저 한테 이러는 거예요."어이, 최 대리!, 이제 아주머니도 정신이 들고 하셨으니, 우리 송도 가서 저녁이나 먹고 오자. 니 보니까, 너무 야위고 그러네..."
그래서 송도엘 갔지요. 꼬박 한 달을 병 간호 하느라, 옷 갈아입는 것은 물론, 먹은 것도 온통 부실하였던 터에, 고마운 형뻘되는 업체 사장님들의 위로 酒로 맥주 한 잔을 받아 마시고 나니, "핑" 돌더군요. 그리곤 맥이 쭉 빠지는게.,,, 조금 더 있으면 그야말로 "헬렐레.."될 것 같아서,,.... 그만 병실로 왔지요.
그래서,...술 기운에 문제를 풀어가게 되었어요
장모님은 위 쪽 구석진 곳에 앉아계시고, 동생은 보조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상태에서 ,
아직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빨리 몸이 회복되어 유리병에 있을 아기를 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아내에게 저는 넌지시 말을 걸었지요.
"여보, 나 지금 술 한잔 하다가 생각했는데, ..................
우리 아기가 커서 한 다섯살 쯤 되었을 때, 나하고 같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둘 다 죽게 되었어,
한 사람을 구하여 야 할 때 당신은 누구 구할래?"
이렇게 시작하여, 근 한시간에 걸친 예화와 설득을 통하여, "우리 새로 시작하자!"라는 결론에 달하였지요.
그 중간에 울음과 위로와, 그리고 구석에 앉아계시던 장모님의 모습은 잘 표현 할 수가 없네요.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다시 길고, 안타까운 한 쌍의 삶이 다시 시작 되었지요.
*이제 다섯 번째 마취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지난번, 병원이야기를 올린적이 있지요.
그 내용이 다섯 번째 마취였던 줄거리이지요.
그렇게 해서 저희 아내는 남들은 한번도 하지 않는 전신마취를 다섯번이나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섯번째 전신마취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이대로............ 몸이 불편한대로 살더라도요,...그래서 남들이 효과 보았다는 指押을 택하게 되었고.
지금 그 시술을 2 ~ 3일에 1시간씩 일곱 번째 받았습니다.
경락술과 함께 받는 指押은 指押士나 환자나 혼쭐이 날 정도로 격(擊)하게 받고 있지요.
발가락 부터 머리까지에 있는 대개의 경락을 指押하고는,
척추의 마디마디를 指押하지요.
그리곤 온 몸을 S 字 형으로 비틀기도 하고,
또, 손을 가슴 앞으로 감싸거나, 뒤로 제끼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틈틈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걷기나, 등산, 침술 등에의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해 주는 데, 그 이야기들에 환자가 홀딱 반해가는 듯 하더군요.
그러니 우선 마음으로 나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요..
그래서 , 움직이지 못하던 저의 아내는 요새는 매일 저녁 저와 함께 근 1시간동안을 동네 주위를 열심히 걷곤 하지요.
주말에는 서울 대공원이나, 선릉을 산책 코스로 잡아놓고 있고요.
指押이라는게 참 좋더라고요. 정말 좋더라고요.
수술비 안 들지요. 병 간호 안해도 되지요.
마음 편 해 졌지요. ...............여러가지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앞으로 5번 정도 더 指押 받으면 거의 회복 될 꺼라는 군요.
指押이라는 게 참, 그러네요...
다만 제대로 된 指押士를 만나는 것이 두말 할 것 없이 중요한 point 지요.
다 읽으시느라 지루 했지요?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이지요.
건강의 첫번째 치료 방법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말의 표현과 포근히 감싸주는 행위라는 군요.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더구나 후손들 한테 잠시 잠깐 빌려쓰는 이 현실에서요............
그저 용서하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그리고 절제하면서,
사랑을 실천함이 몸에 배여 있을 때,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다 건강하게 되라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좋은세상의 삶의 한 토막 이야기 였습니다-"03.8.18.
1977년...울산에서 태어난 딸,..그리고...마눌님 &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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