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2004년), MBC Radio- 동의보감-건강 강의 하셨던,
한의원 원장이신 신재용님의 '건강은 마음으로 다스려라'의 열한 번째 글부터 열일곱 번째의 글 입니다.
옮긴 이유는 좋은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갖기 위함입니다.
(--저작권의 침해가 아닌 것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좋은 내용들을 마음에 담아두시면서 좋은 삶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
11 - 넷째 손가락을 펴 보세요.
주먹을 쥐어 봅시다. 그리고 둘째손가락을 펴봅시다. 잘 펴질 겁니다.
그럼 다시 주먹 쥐고 셋째 손가락을 펴봅시다. 역시 잘 펴질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주먹 쥐고 넷째 손가락을 펴봅시다. 마음먹은 대로 곧게 펴기 어려울 겁니다.
이제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다섯째 손가락을 구부려 봅시다. 이상하게도 넷째 손가락이 엉거주춤하게 구부러질 겁니다.
주먹을 다시 쥐고, 주먹 쥔 채 엄지손가락을 펴봅시다. 잘 펴질 겁니다. 그 상태 그대로 둘째손가락까지 펴봅시다. 역시 잘 펴집니다. 셋째 손가락도 펴봅시다. 이것도 잘 펴질 겁니다. 이렇게 주먹 쥔 채 엄지, 둘째, 셋째 손가락을 다 펴 봐도 잘 펴지는데. 이 상태에서 넷째 손가락 가지 펴려면 잘 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 어정쩡한 손가락에 우리는 결혼반지를 끼워 줍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혼자 펼 수 없는 넷째 손가락처럼 네가 우주를 알면 얼마나 알고 네가 삶을 알면 얼마나 아는가, 그러니까 네 주장과 네 자만을 고집하며 거드럭거리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결혼 생활을 하라는 의미에서 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주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다섯째 손가락을 구부릴 때 넷째 손가락이 함께 구부러지는 것처럼 네가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상대가 원하면 기꺼이 너도 함께 하라는 의미에서 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주는 것이겠지요.
가장 완전하고, 가장 편안한 휴식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 침묵 속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작은 몸짓 하나에서도 '우리는 연인'이라는 노래가사처럼 이루어진다면, 이게 바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에로스와 푸쉬케의 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과 더불어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사랑은 의혹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에로스와 푸쉬케의 신화는, 그래서 우리에게 커다란 걸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믿음과 더불어 함께하지 못한다면 죽음과 파멸, 별리와 절망만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편안한 휴식은 바로 건강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건강은 가장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칼과 가위보다 바늘과 실이 더 필요합니다. 째고 자르는 것보다 꿰매고 덧대어 이으면서 보듬는 게 사랑입니다. 넷째 손가락처럼 절대 교만하지 않는 게 사랑이요, 가장 온유한 게 사랑이라고 합니다. 모든 걸 감싸주며 모든 걸 나누는 게 사랑이라고 합니다.
건강도 이와 같아서 항상 보듬고 가꾸며, 건강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겸허하게 작은 꿈처럼 차분히 이루어 나가고, 나만의 건강을
향유하려 아니하며 둘레와 건강을 나누며 아우르며 사는 것입니다.
건강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12 - 주어진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세요
어떤 사내가 크고 무서운 뱀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그는 뱀과 싸웠답니다.
허나 뱀을 당할 수 없어 도망치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뱀이 뒤 쫓아와 도망도 치지 못하고 또다시 싸우느라고 기진맥진해졌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떤 현자가 나타나 말하더랍니다.
"도망치는 것을 멈추시오, 싸우는 것도 멈추시오."
사내가 말했답니다.
"가만있으면 저 뱀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말해 주더랍니다.
"내 말대로 뱀 곁으로 가서 그 옆에 누워 뱀의 머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시오.
그러면 뱀은 당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당신은 살아날 겁니다."
이 전설에 나오는 뱀은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운명과 싸우려 하고,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도망치고 있지만 점점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까닭에 싸우려고도 도망치려고도 하지 말고 뱀 곁에 누워 적응하고 운명의 머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면서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운명을 긍정하고 그것에 적응하면 운명 또한 우리를 긍정하고 우리에게 적응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마음의 평온함과 함께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뱀 곁에 누울 수 있는 이 평온함과 용기는 '나는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중에는 나의 통제 밖에 있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원망하고 앙탈하고 한을 품는 것은 나의 마음의 '평온'이 부족한 것입니다. 또 내가 원하는 것 중에는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 바람이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을 때 나는 화가 납니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용기'가 부족한 겁니다.
따라서 평온과 용기를 갖고 적응하고 또 변신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화가 나면 감정을 계속 되새기면서 묵은 감정까지 덧붙임으로써 분노가 폭발할 때까지 분노심을 스스로 키우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불에 불을 지피고 불에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 폭발로 결판내고자 한다고 결판날 그런 문제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때는 스스로 네 가지 질문을 먼저 하라고 합니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느끼고 있는가,
나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이렇게 네 가지 질문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차분하고 슬기롭게 한 번 대결하라는 겁니다.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이 대결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한의 찌꺼기를 떨쳐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떨쳐버리겠노라고 고집하지는 말라고 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려는 것에 불과할 뿐 삶의 현실에서는 무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신과 타협하면서, 자신을 그 상황에 걸맞게 변신하면서 적응하는 방법이 현명하다고 합니다.
다만 진정한 '평온'과 진정한 '용기'를 잃으면 안 됩니다.
++++++++++++++++++++++++++++++++++++++++++++++++++++++++++++++++++++++++++++++++++++++++++
13 - '내 탓'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만일 아기가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이 아기는 두 사람으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
<탈무드>는,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다른 한쪽의 머리가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다른 한쪽이 만일 시원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둘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아파하면 나도 아파할 때
두 얼굴의 한 아이, 같은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한 얼굴이 '내 탓'의 마음을 가지면
다른 한 얼굴도 '내 탓'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네 탓'으로 여길 때는 불신이 싹틉니다. 미움과 증오가 커집니다.
그러나 '내 탓'으로 여길 때는 용서와 이해가 쉬워지며
너에 대한 정겨움과 고마움이 우러납니다.
'내 탓'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믿음과 꿈, 사랑과 감사로 살 수 있기 때문에
비록 건강하지 못한다 해도,
비록 장애로 불편하게 산다 해도,
비록 충분치 못한 조건이라 해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행복해집니다.
건강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건강해집니다.
'내 탓'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그런 맘이 됩니다.
이럴 때, 나와 너, 우리는 우리의
가장 진실한 숨결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뜨겁게, 가장 깊게
나의 숨결과 너의 숨결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심원한 만남, 경건한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설령 마주보고 있지 못해도,
설령 말이 없어도,
우리는 이런 만남을 통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이렇게 시를 썼나봅니다.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어 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인 줄 알겠다.
++++++++++++++++++++++++++++++++++++++++++++++++++++++++++++++++++++++++
14 - 혼 가진 인형이 주는 교훈
주나라 다섯 번째 천자 목왕은 '언사'라는 이름의 기술자를 얻었습니다. 그는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었습니다. 걸음걸이, 몸놀림이 흡사 사람 같았습니다.
어느 날 인형은 왕이 그토록 총애하는 여자에게 윙크를 하며 추파를 던졌습니다.
왕은 노했습니다. 그래서 언사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언사는 '이건 인형에 불과하다'고 하소연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믿지 않고 노여움을 풀지 못했습니다.
언사는 인형을 풀어 헤치며 이건 인형이라고, 사람 닮은 허상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인형의 심장을 떼어내자 인형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간을 없애자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신장을 없애자 발로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열자'의 <탕문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옛날에도 사람 닮은 인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나라 조조 때는 진평이라는 사람이 나무 인형을 만들고 기계장치로 움직여 성벽위에서 춤추게 했다고 합니다.
'예기'의 <단궁편>에는 이런 인형을 '용'이라고 했습니다.
나무를 깎아서 사람을 만드니 스스로 움직이고 살아있는 사람과 다름없는데, 다만 성령지식이 없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왕 때 언사가 만들었던 인형은 걸음걸이, 몸놀림만 사람 같았던 게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에게 윙크도 할 줄 알았던 인형입니다.
코로디가 만든 장난꾸러기 나무 인형 피노키오처럼 정말 사람과 흡사한 인형이었습니다.
심장이 있기에 말을 할 수 있었고, 간이 있기에 눈으로 볼 수 있었고, 신장이 있기에 발로 걸을 수 있었던 인형입니다. 기계장치로 움직이고 춤을 추었던 인형이 아니었습니다.
뇌가 있고 핏줄이 있고 성령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인형이야기를 통해 배울 게 있습니다.
심장을 떼어내면 말을 할 수 없었던 인형처럼 말을 하되,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되, 드높은 '신'만으로, 심장이 간직하고 있다는 '신'만으로, 심장에 있는 말만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에 발린 말로 살지 말고 말입니다.
간을 없애자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인형처럼 눈으로 보되, 보고 싶은 것은 다 보되, 정화된 '혼'만으로, 간이 간직하고 있다는 '혼'만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장을 없애자 발로 걸을 수 없었던 인형처럼 걷되, 걷고 싶은 대로 걷되, 순수한 '정'만으로. 신장이 간직하고 있다는 '정'만으로. 걸어야 할 길, 걸을 길만 걸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 인형을 만들 때 눈은 될수록 작게 파내고, 코는 될수록 높게 깍으라고 합니다. 작은 눈은 더 크게 파낼 수 있고, 높은 코는 더 낮게 다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파낸 눈을 작게 만들 수 없고, 낮게 깎은 코를 높게 다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 인형을 만들 때처럼 살아갈 때에도, 말하고 보고 걸으며 살아갈 때에도,
작게 해야 할 게 있고 높게 해야 할 게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
15 - 하늘과 하나, 자연과 하나 되어 살라네,
'황제'는 어머니에게 12면 큰 거울을 만들어 바쳤다고 합니다.거울을 얻은 것은 천하를 통일한 상징입니다.
'걸왕'은 옥거울을 잃어버렸습니다.
호랑이가 이것을 삼키고 밤이면 두 눈을 파랗게 뜹니다.
'진'은 금으로 만든 거울을 잃어버렸습니다.
물고기가 이것을 삼키고 두 눈이 황금빛 금 구슬처럼 되었습니다.
거울을 잃는 것은 천하를 상실하는 암시입니다.
이렇게 거울은 하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울처럼 살라는 말은
하늘의 뜻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이집트에서는 거울에 햇빛을 반사시켜 악령을 쫓았고
그리스에서는 신을 거울로 하여금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울 속에 온갖 도깨비나 귀신이 숨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거울의 신령 현상이요, 거울의 종교성입니다.
거울을 '신감(신을 모시는 감실)'이니 귀신의 본성까지도 본다느니 하는 게 이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거울처럼 살라는 말은
드높은 정신세계에서 숨길 게 없이 살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선비들이 거울을 지니고 다님으로써
일상행실을 계감(따져보아 덜어 낼 것을 덜어 냄)했다고 합니다.
거울이 청백과 진리를 상징하는 게 이런 이유입니다.
물론 거울은 애정의 보증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부부간의 파탄을 '파경'으로 표시했던 게 이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거울처럼 살라는 말은
말고 올곧게, 헤아려 생각하며, 후회하지 않게 살라는 말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이는 마음 쓰기를 거울과 같이 한다.'
허심무욕하기가 마치 거울 같아,
일부러 뜻을 보내고 받는 일 없이
오직 사물이 오는데 응할 뿐,
마음속에 앙금이 가라앉지 않게 살라는 겁니다.
간교한 지혜나 용기 따위로 사는 게 아니라
사물의 오고감에 따라 번뇌희비하며 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기를 조용히 길러
하늘과 '하나'
자연과 '하나'되어 살라는 겁니다.
+++++++++++++++++++++++++++++++++++++++++++++++++++++++++++++++++++++++++++++++++
16 - 남을 살핀 후 나를 아는 게 아닙니다.
용서 !
용서라는 단어의 '용'은 '용납하다라'는 뜻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허물이 적은 것이기 때문에 받음이 가능하고, 허물이 큰 것이기 때문에 받음이 힘든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작으냐, 크냐 하는데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느냐 받아들일 수 없느냐 하는 차이가 생길 뿐입니다.
작은 그릇은 작은 것밖에 못 받아들이고 큰 그릇은 큰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 리 되는 바다에는 만 리의 물이 가고, 천길 되는 산에는 천 길의 흙이 실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삼일신화>라는 책에는 '넘침도 용납함이 아니요, 무너짐도 용납함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새겨둘만 한 말입니다.
용서라는 뜻의 '서'는 '여(如)'와 '심(心)'이 합쳐져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처럼 같다'는 듯이 바로 '서'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리는 것이 '서'라는 겁니다.
'서'에는 두 가지가 있답니다. '추서'와 '용서'가 그것입니다.
정약용은 <논의경의>라는 글에서 추서와 용서를 이렇게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서와 용서는 비록 서로 가까운 것 같으나 그들의 차이는 천리가 되는 것이다.
추서는 스스로 가다듬는 것을 위주로 하는 까닭에 자기의 선을 실행하는 것이다.
용서는 남을 다스리는 것을 위주로 하는 까닭에 남의 잘못에 관대한 것이다. 이를 어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용서는 너를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한 선이지만 추서는 나를 받아들이는 최고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게 베풀기를 원하지 않거든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고,
<자공>은, 나는 남에게 당하기 싫은 일은 나도 남에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며,
<태학>에는 웃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아야 하고 아랫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웃사람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가. 그렇다면 너도 역시 그렇게 하고 싶어하겠지,
옛 어른은 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길은 먼저 가고 싶어 하고, 문은 먼저 들어가고 싶어 하며, 계단은 먼저 오르자고 하고,
자리에는 먼저 앉고자 하며, 겨울에는 먼저 따뜻하고자 하고, 여름에는 먼저 서늘하고자 하며,
주리면 먼저 먹고 싶어 하고, 목마르면 먼저 물마시고 싶어 하는 것이니
날마다 쓰여 지고 항상 실행하고 있는 갖가지 일들의 정욕은 다 내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남을 살피지 말라, 남들이 나와 같다는 사실을, 남을 살핀 후에야 아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17 - 물 마르고 빛바랜 낙엽이 꽃보다 싱싱합니다.
늦가을 늦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누워 잎 틈새를 비집고 들면 가을은 오수에 겨운 여인의 긴 하품처럼 나른하게 안겨 옵니다.
굽져 돌고, 또 굽져 도는 산속 오솔길 울녁(언저리)에는 먹피처럼 바랜 꽃 향유와 눈과 불주머니의 누런 꽃이 몇 개 겨우 매달려 있습니다.
분명 이 길은 자갈길인데, 자갈보다 드러누운 낙엽이 더 많습니다.
햇살만큼 게으른 바람이 스쳐가는데도 '와~와~'잎새들은 몸살 앓듯 아우성치며 쏟아집니다.
바람보다 떨어지는 잎새가 더 많습니다.
꽃 진 자리에 열매 맺히듯 잎 진 자리에 새 잎을 틔우기 위해 잎새들은 이렇게 몸을 풀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죽어버린 꿈의 시체'가 아니라 내일 꿀 꿈을 위해 이렇게 자갈길에 편히 눕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물 마르고 빛바랜 낙엽이 오히려 싱싱합니다.
가을만의 색조, 가을만의 사색, 가을만의 생명이 있는 산속 오솔길 낙엽을 밟다 굽돌다 그만 발을 멈췄습니다.
노랗게 익을 대로 익은 숲길에 꼬오옥, 손을 꼬오옥 잡으며 산새처럼 속삭입니다.
"저 너멋골에는 천국이 있을 것만 같애."
듣고 보니 그래, 저 너머 골로 가는 낙엽길이 천국에 이르는 길 같았습니다.
시몬, 당신이 예수를 만났던 아피아 길이 바로 이 길은 아니었나요?
당신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으려 되돌아오던 길, 당신이 '쿼바디스 도미네'라 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은 아니었나요?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너머 골로 가지 않고 발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산길을 다시,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노라면 사람들은 더러 가야만 하는 길, 그 신념의 길을 나 때문에 돌아갑니다. 사노라면 사람들은 더러 가고 싶은 길,
그 행복의 길을 너 때문에 피해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함께 갑니다.
사노라면 사람들은 더러 갈 길을 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 길을 잘못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투쟁과 안일, 그리고 웃음과 한숨으로 걸었던 길을 돌아봅니다.
걸었던 길을 돌아보는 게 길의 본성입니다. 갔다 왔다 하는 것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게 오는 것, 오는 게 가는 것, 그것이 길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옛글에, 가는 것은 이미 지나갔고, 오는 것은 머물지 않는지라, 가고가고 오고와서 그 형세 장차 다함이 없나니,
어제가 가고 오늘이 오는 것은 시간의 길이 있음이요, 여기서 가고 저기서 오는 것은 곳의 길이 있음이요,
처음이 가고 나중이 오는 것은 일의 길이 있음이라. 그러므로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면 천지만물이 없어지게 되리라.
그러나 감이 있고 옴이 있음도 모두 또한 가달됨(거두어들임)에서 말미암으니, 오직 하나요, 둘이 없으면 무엇이 가고 무엇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나와 아내는 잎 진자리에 새 잎을 틔우기 위해,
죽어버린 꿈이 아니라 내일 꿀 꿈을 위해 산길을 다시, 다시 내려오기 시작 했습니다.
물 마르고 빛바랜 낙엽이 꽃보다 더 싱싱합니다.
++++++++++++++++++++++++++++++++++++++++++++++++++++++++++++++++++++++++++++++++++++++
'좋은 글·옮겨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50년을 참아온 눈물 ♡ (0) | 2017.12.08 |
---|---|
♡ Just 10 Minutes! ♡ (0) | 2017.12.08 |
옮긴 글 - 신재용님의 '건강은 마음으로 다스려라' 중의 글들,.. (0) | 2013.07.18 |
옮긴 글 - '건강은 조화'라고 말들을 합니다. (0) | 2013.07.17 |
옮긴 글 - 건강은 무엇을 위해 필요합니까? (0) | 2013.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