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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e gut alles gut!

촹식 2021. 12. 5. 16:17

"Ende gut alles gut!"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黃泉길은 

往復이 아니라 물어볼 사람도 없고, 

택일할 수도 없지 않은가? 

갑작스런 訃告나 날아드는 臥病 소식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知人 (A)가 심장마비로 갔다. 

아직은 ‘6학년’인데, 猝地에 떠나니 隔阻했음이 참 미안하였다. 

몹쓸 癌으로 쓰러진 분들과도 

생전의 소회(所懷)를 털고 갈 機會는 가지기가 어렵다. 

다른 持病을 앓아 入院하는 경우라면, 

손이라도 붙잡고 德談이라도 나눌 터인데! 

어느새 함께 고생하고, 어울려 부대끼던 옛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나이에 내가 이른 거다.

 

당장 죽을 일이 아닌 각종 통증이나 불면증, 관절염 등과 같은 노인병은 

대체로 노화(Degeneration)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연세가 있어서'라고 위로를 하지만, 

대증(對症)치료 외에는 묘방(妙方)이 따로 없다. 

다른 말로는 종착역으로 서서히 다가서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래저래 아픈 사람이 적지 않다. 

이명(耳鳴)이 심한 (B)는 

어린아이 같아졌다. 위엄이 대단한 CEO이셨다. 

 

요양원 트랙을 완보(緩步)하는 (C)는 

40년 동지를 못 알아본다. 자존감과 의욕이 넘쳤던 분이다. 

 

여행친구 (D)는 

루게릭(ALS) 진단을 받고 시골집에 누워있다. 

펄펄 날아다니던 양반이 말까지 잃었다. 

 

깔끔하던 (E)는 

외식(外食)을 끊었다. 

파킨슨으로 불편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다. 

 

동네 선배 (F)는 

초문(初聞)의 ‘3차 신경통’으로 얼굴이 불시(不時)에 일그러진다. 

아직 한창이신데 말이다.

 

이만큼이라도 살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라고 자위하기에는, 

아픈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 겪고 있는 처지가 너무 딱하다. 

곧 닥칠 죽음만을 기다리거나, 

정신 기능이 손상을 입어 ‘삶의 질’조차 추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저 암담할 따름이다.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는 것, 

그중에서도 정신이 건강해야 함이 최우선이다.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육체적인 고통은 상당부분 감경(減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 强健해지려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야 한다고 했다. 

심신에 쌓인 독을 빼고 때를 벗겨내는 일이다. 

쟁여만 두었던 잉여물건들도 서슴없이 버려야 한다. 

 

도덕경 12장의 49자를 염송(念誦)하면서 

노자(老子)의 ‘위복불위목(爲腹不爲目)’이 내 삶에 자리할 수 있도록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하는지를 실천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오감(五感)으로부터의 유혹을 떨쳐버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건강하면서도 삶이 즐거워야하지 않겠는가?

 

삼식(三食)이의 행태는, 

세끼 밥 먹고 산책을 하거나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상으로, 

대체로 비슷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이란 호사가 어렵게 되었으니 

기껏해야 맛집 탐방과 잔디밭 운동으로 일탈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졸다 깼다 하며 보는 TV는 수면건강을 해친다. 

 

책도 신문도 잘 읽지 않으면서, 맡겨지는 손주나 보다가, 

가차없이 뜨는 핸드폰의 메시지나 펌글을 훑다 보면 

어깨는 굽어지고 눈은 멍해진다.

소일(消日)하며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다. 

이래도 될까? 

‘얼마나’ 될지 모르는 여생(餘生)은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G)는 속세와 절연하고 종교에 귀의하였다. 

(H)와 (I)는 도시를 떠나 농부가 되었고, 

(J)는 강변 드림하우스로 이사하였다. 

미국친구 (K)는 마이매미 해변으로 은퇴하였고, 

이태리 금융인 (L)은 알프스 포도원에서 프랑스 여인을 새로 맞았다.

 

새 삶을 결심하고 실천한 분들이다. 

용기와 도전을 존경하며 부디 행복한 내용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란 표지를 도처에서 만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니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경구(警句)이리라. 

 

이제 백수를 누린다 해도 앞으로 살날은 지금까지 산 날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유일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도 

엄숙하기보다는 춤추면서 노래하는 사랑의 파티로 해석하는 것 같다. 

삶은 즐거워야 하니까.

단테가 손을 이끌었다. 

폭식, 탐욕, 분노, 사기, 폭력, 색욕, 배신, 이단 등등 

죄인들이 형벌을 받고 있는 심연의 아비규환, 바로 지옥이다. 

 

고백하건대, 책(責)을 잡을라 치면 

나야말로 지옥의 여러 수렁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 분노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언어폭력을 일삼았던 지난날은 

쉽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싶었다. 

고맙게도 연옥으로 다시 인도되어 

눈물겨운 참회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Happy Ending이다.

 

꿈에서 본 천국은 과연 있는 것일까? 

육신은 연기로 사라지고 흙먼지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정신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회의(懷疑)를 뒤로 하고 매일 잠들기 전 ‘성찰의 시간’을 가진 지가 꽤 되었다. 

반성은 참회와 깨침의 시간이다. 

책을 읽고 명상하며 글을 쓴다. 

오늘 하루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고운 말을 쓰고 착하게 살았는지를 

자문(自問)하는 루틴이다.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있음을 나날이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십대 후반부터 ‘소리장애’인 이명(耳鳴)을 앓고 유서까지 썼던 ‘베토벤’은, 

질병과 고독을 이겨내고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아이폰의 ‘스티브 잡스’는 

죽는다는 생각이 인생에서 결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고 술회하였다. 

종국에는, 

성공과 보람을 기대하며, 기쁜 마음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은, 

우연이겠지만, 단테와 같은 56년의 삶을 살았다. 

 

시대가 다르다 하더라도, 

‘잉여인간’이 한 甲子를 더 돌아 온존하고 있음을 감사하게 여긴다.

 

운동할 때마다 日記를 쓰는 (M)은 

디오픈(the Open) 경기장을 섭렵하였다. 

노력하고 즐기며 도전하는 태도를 존경한다. 

 

가톨릭신자 (N)은 

산티아고 순례 길을 完走한 후 半島를 縱橫하고 있다. 

발로 쓴 日記는 가식이 없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우천(雨天)에도 불구하고 1인 시위를 나서는 

(O)선배의 애국심에게는 고개가 숙여진다.

 

잘못을 회개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육신이 아닌 정신의 영역이다. 

 

‘다빈치’가 安葬된 프랑스 고성(古城)의 조그만 교회,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의 ‘판테온 신전’, 

‘쇼팽’의 심장이 安置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 등을 

찾아가서 내 삶을 반추하고 정화하는 식의 여행은 만년의 Bucket list이다. 

 

이승을 떠난 偉人들의 崇高한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조만간 현충원과 망우리의 선열도 찾아뵐 것이다.

 

삶이 끝날 때까지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는 것이다. 

“Ende gut alles gut!”

                ☞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바람 부는 둑방길은 벌써 가을이다.

 

                                          내용이 너무 좋아서  옮긴 글입니다.

                                           (사촌 누이한테서 받은 글이고요.)